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 (문단 편집) ==== [[에드먼드 머스키]]의 우세와 몰락 ==== 초기 우세를 잡은 것은 1968년 대통령 선거에서 험프리의 부통령 후보였던 [[에드먼드 머스키]] 상원의원이었다. 머스키가 출마한다면, 비록 승리하지는 못하더라도 닉슨에 근소하게 뒤질 것으로 예상되었다. 그러나 1월 24일 열린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에드 머스키가 비록 후보 중에는 35.5%로 1등을 했으나 조지 맥거번같은 무명 상원의원이 22.6%를 기록하는 이변이 일어나 머스키의 우위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. "Endorsement Ed"라는 별명까지 붙여질 정도의 프론트러너라기엔 너무 초라한 모습이었던 것이다. 게다가 압도적인 재선을 원하고 있던 닉슨은 [[워터게이트 사건|상대 후보에 대한 도감청, 언론 공작, 선거 캠프 분열 유도 등의 수작]]으로 머스키를 침몰시켰다. 머스키가 프랑스계 미국인 유권자들을 폄훼했다는 소문을 퍼트리는가 하면 부인이 담배를 피우고 문란한 사생활을 즐긴다며 영부인감이 아니라고 건드리는 비열한 공작도 서슴치 않았다.[* 이러한 공작은 워터게이트 사건 특검으로 모두 실체가 폭로되었고 동정론을 받은 머스키는 1976년 대선에서 다시 부통령 후보군으로 고려되기도 했다.] 에드먼드 머스키는 격분해 네거티브에 반박하는 성명을 냈다. 이때 성명이 눈이 내리는 날 야외에서 진행되었는데, 눈이 얼굴에 닿아 녹아내린 것을 두고 닉슨 측 텔레비전 언론들은 "머스키가 감정적으로 대응해 울음을 터트렸다!"라고 거짓 보도를 했다. 유권자들은 이 말을 믿고 머스키를 대통령이 되기에 너무 감정적이고 조급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. 거기에다 또 악재가 겹치고 마는데, 뉴햄프셔 프라이머리가 다가오는 와중 유권자들이 야밤중에도 걸려오는 "Harlem for Muskie Committee"의 전화에 격노하게 된 것이다.[* 격노한 머스키의 선거운동 매니저 번 번하드는 맥거번 선거팀의 프랭크 맨키위츠에게 당장 멈추라고 말했고, 맨키위츠는 갑자기 헛소리 하는 것에 빡쳐 대체 뭘 멈추란 거냐(...)고 응수했다 한다.] 그렇게 다가온 3월 7일의 결과는 끔찍했다. 머스키가 이기긴 했으나, 당초의 예상이었던 65%와 다르게 단 46%의 처참한 결과를 받아들게 된 것이다. 그렇게 머스키의 압도적인 선두주자 자리는 무너지고 말았다.[* Nixonland 632p]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1972년 대선 민주당 여론조사.png|width=100%]]}}} || || '''1972년 민주당 경선의 동향'''[* 1969년 7월 "차파퀴딕 사건"으로 테드 케네디 의원의 지지율이 폭락했으며, 1972년 1월 "머스키 오열 사건"으로 머스키의 지지율이 폭락하는 추세를 볼 수 있다.] ||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